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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목요일의 21입니다. 돈이 많다면 필름 카메라도 잔뜩 사고 필름도 박스째 쌓아두고 살았겠지. 냉장고 한 칸은 코닥이랑 후지로 꽉 채워두고, 오늘은 무슨 색으로 해볼까 하는 고민이나 하면서. 라이카 M6, M7 하나쯤은 괜히 목에 걸고 나가서 커피 사진 찍고, 현상 맡긴 봉투 뜯으면서 입꼬리 올리는 흉내도 좀 냈을 거다. 근데 현실은 다르지. 바디 하나 살 때도 리뷰 수십 개를 돌려보고, 필름 한 롤 가격 보고 손이 멈춘다. 셔터 한 번 누르는 데 돈이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사람을 주저하게 한다.

필름을 1년에 2롤 살까 말까 하는 수준이 되면, 이제 취미라기보단 거의 연례행사처럼 변한다. 계절 한 번 바뀔 때 겨우 한 롤 넣고 찍는 거지. 괜히 오늘은 필름 넣어볼까 싶다가도 가격을 보면 손이 멈춘다. 예전에 그냥 가서 집어 오던 물건을 이제는 유통기한 확인하고, 해외 직구 가격 비교하고, 현상비까지 계산하게 됐으니까. 셔터 누르기 전부터 이미 머릿속에서는 가계부가 돌아간다.

 

내가 쓰는 필름 카메라인 KODAK EKTAR H35N이다. 하프 프레임 카메라다.

필름 크기: 18×24mm (표준 35mm의 절반)
프레임 수: 36컷 필름에서 약 72컷 촬영 가능
화면 비율: 3:4 (세로 구도)
사용 필름: 표준 35mm 카트리지.

KODAK EKTAR H35N은 완성도 높은 카메라라기보단 부담 없이 들고 나가는 토이 카메라 느낌이 강하다. 가볍고 작고, 조작도 단순하다. 하프 프레임 특성상 기본적으로 세로 사진 위주로 찍히는데, 오히려 요즘처럼 모바일이나 인스타그램 화면에 익숙한 환경에서는 이런 구도가 꽤 잘 어울린다. 다만 프레임 자체가 작다 보니 일반 35mm보다 입자감은 더 거칠게 올라오고, 선예도 역시 기대하는 쪽의 카메라는 아니다. 대신 씨네스틸 400D나 800T 같은 필름을 넣으면, 깔끔한 결과물보다는 거칠고 영화 같은 분위기가 의외로 잘 살아난다.

필름이 너무 비싸서 씨네스틸 400D나 씨네스틸 800T 같은 필름은 하프 프레임 카메라에 넣어 쓴다. 35mm 필름 한 컷을 절반 크기로 나눠 쓰는 방식이라, 같은 한 롤이어도 컷 수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나온다. 36컷이면 72장 찍을 수 있으니, 그나마 셔터 누를 때 부담이 덜한 거지. 물론 화질이니 입자니 따지기 시작하면 또 말이 길어지는데, 애초에 그 필름을 마음 편하게 한 컷씩 태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결국 이렇게라도 아껴 쓰게 된다. 낭만도 가격표 앞에서는 조용해진다.

KODAK EKTAR H35N에 씨네스틸 400D를 넣으면 주간에는 꽤 무난하다. H35N 자체가 설정할 수 있는 게 없는 카메라라서, 밝은 낮이나 흐린 날처럼 빛이 어느 정도 있는 상황에서 제일 편하게 쓸 수 있다. 400D는 색이 너무 튀지 않고 부드러운 편이라 바다, 골목, 카페 앞, 여행 스냅 같은 사진에 잘 맞는다. 다만 하프 프레임이라 일반 35mm보다 프레임이 작고, 그래서 입자감은 더 빨리 올라온다. 선명하고 깨끗한 사진을 기대하면 아쉽지만, 살짝 거칠고 느슨한 필름 느낌을 좋아하면 오히려 그 부분이 재미로 남는다.

망쳐버린 장노출 사진. 필름 아까워...

야간에 400D를 넣으면 조금 애매해진다. ISO 400이라 아주 어두운 곳에서는 힘이 부족하고, H35N은 셔터 속도나 조리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카메라가 아니라서, 노출 부족이나 흔들림이 쉽게 생긴다. 그래도 간판, 가로등, 실내조명처럼 빛이 어느 정도 있는 곳에서는 완전히 못 쓸 정도는 아니다. 결과물은 깔끔하다기보다 어둡고 거칠게 나오는데, 그걸 실패로 볼지 분위기로 볼지는 취향 문제다.

씨네스틸 800T는 주간에 쓰면 조금 더 까다롭다. 원래 텅스텐 필름이라 낮에 그대로 쓰면 색이 차갑게 틀어지거나 푸른 기운이 돌 수 있다. 그래서 한낮보다는 야간에 800T가 어울린다.

간판, 가로등, 자동차 불빛, 카페 조명 같은 조명에서 씨네스틸 특유의 영화 같은 색감과 빛 번짐이 잘 살아난다. H35N의 단순한 렌즈와 하프 프레임의 거친 느낌까지 섞이면 결과물이 깨끗하진 않아도 분위기는 꽤 강하게 나온다. 대신 결과 편차는 감수해야 한다. 비싼 필름을 넣었다고 안정적인 사진이 나오는 카메라는 아니다. 잘 나오면 꽤 매력적이지만 망하면 그냥 망한 사진이다.

그렇게 비싸진 필름 결과물이 꼭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거지. 초점 나가고, 흔들리고, 노출 틀어지고, 먼지 들어가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감성이라고 부르더라. 사실 감성 이전에 돈이다. 여유가 있어야 감성도 나오는 거지. 하루 벌이 계산하다 보면 셔터 누르기 전에 통장 잔액부터 본다. 참 낭만적이지 않지.

그래서 디지털로 돌아오게 된다. 메모리카드는 몇천 장을 찍어도 추가 요금이 없고, RAW든 JPG든 마음대로 굴릴 수 있다. 실패해도 그냥 지우면 끝이다. 효율만 보면 디지털이 좋지. 근데 또 이상하게 사람은 불편한 걸 그리워한다. 필름 감도 바꿀 수도 없고, 결과물 바로 확인도 안 되고, 현상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비효율을 자꾸 떠올린다.

웃긴 건 디지털로 찍으면서도 결국 필름 같은 색감을 찾는다는 거다. 선명하고 깨끗하게 찍어놓고는 다시 입자 넣고, 색을 죽이고, 대비를 틀고, 오래된 사진처럼 보이게 만든다. 편하려고 디지털을 쓰면서, 결과물은 불편했던 시절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참 피곤한 취향이지. 그래도 어쩌겠나. 선명하고 깔끔한 사진보다 약간 망가진 사진이 더 오래 눈에 걸릴 때가 있으니까.

취미도 돈이다. 사진은 더더욱 그렇고. 필름 한 롤 끝나면 다음 필름값이 보이고, 현상비가 보이고, 스캔비가 보인다. 끝이 없다. 그러니까 가끔 필름 사진은 느리게 찍는 맛이라고만 말하지만, 실은 느리게 찍는 게 아니라 비싸서 함부로 못 찍는 거지. 돈 없으면 한 컷도 중요하다. 엄청 중요하다. 필름 한 롤 아끼려고 괜히 구도 오래 잡고 있으면, 낭만보다 돈이 먼저 끼어든다.

그래도 또 산다. 안 산다고 해놓고 괜히 가격 검색해 보고, 사진 올라온 거 한참 들여다보고, 색감 이야기 나오면 또 마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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